마태복음 6:9-13
주기도문의 제2기원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누구의 나라도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실레이아’는 그 기원과 성격이 철저히 하나님께 속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링컨의 말처럼,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나라로서, 그 나라는 오직 위로부터 임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나라가 아니고, 이 땅에서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세우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오는 것, 임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나라가 존재합니다. 두 나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있지만 서로 다른 제도와 정치 질서를 통해 다스려지는 두 왕국입니다. 궁극적으로 일시적인 도성은 자아에
대한 사랑에 주목하며 지배와 그 순간에 적합한 온갖 방법을 통해 이 욕구를 채웁니다. 거기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함께 공동의 과업을 추구하며 살지만 그곳은 기독교인의 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연구는 세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첫째는 충돌모델입니다. 이
모델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갖는 권력은 같은 형태, 본질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물리적인 힘으로
압제하는 폭력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교회가 정치력이나 금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초이며, 또는 성령의 능력이 귀신의 능력과 충돌한다는 미신적인 생각들을 낳았습니다.
둘째는, 화해의 모델입니다(톰 라이트).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타락한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같은 폭력에 근거한다는 생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는 바벨론을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화해의 모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의 질을 바뀝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폭력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속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천국 권력과 천국 방식의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명 중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셋째는, 구원모델입니다(김세윤). 창조이전의
아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고작 유대민족의 회복이나, 세상의 변화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근거하거나
피조물의 범주에 제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권운동이나 환경운동이나 반정부활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우리 인간이 우리 피조물성을 극복하고 피조물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는
것, 성경언어로 말하면 영생을 얻는 것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 사이에서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서 비성경적인 부담감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도성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그것은 충돌모델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세상 권력을 같은 형태, 즉 폭력으로 보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상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망명 exile’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Throughout the
time of you exile)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3-19)” 이 망명(exile)기간에 신자들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갑니다(벧전2:4-5)
망명중인 교회는
땅에 존재하면서 하늘을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살되 이방인처럼 삽니다. 모든 외국 땅이 그들의 조국이며 모든 조국이 그들에게는 외국 땅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세월을 보내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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