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1-2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사회 문명의 위기를 열거한 후에 현대인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있다고 말합니다. 강요된 질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혼란 없는 자유의 토대, 즉 성경의 계시로 돌아갈 건지입니다.

경제파탄, 전쟁위협, 폭력과 테러, 부의 집중, 식량과 자연자원의 고갈, 환경과 질병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두려움에서 국가나 군주가 보호해줄 것을 약속 받고 소시민들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어느 정도 유보합니다. 이것이 강요된 질서입니다. 많은 경우 국민들은 그 선택에 의해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독일인들이 자신감을 잃게 되면서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봉건사회에서 군주의 착취를 경험한 시민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영국이 체로슬로바키아를 넘겨주고 히틀러와 평화조약을 맺었을 때, 처칠은 우리는 전쟁없이 패배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후에 수많은 카자흐인들이 소련으로 끌려가 학살을 당했습니다. 공산주의 소련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백오십만명의 소련인들이 자신의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서양은 도덕적 전투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패배당하고 있다는 말에 우리는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다수결의, 실용주의, 공리주의가 아닙니다. 생명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메시지는 진리이고, 그것은 진리에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진리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인격적인 것과 시간과 우연의 결과가 아니며 우주, 시공간 연속체의 창조주이신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계시아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이 저마다 속한 사회에서 공동의 합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 다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세계관을 소유하고 이를 토대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십계명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 기초합니다. 십계명의 서문에는 하나님의 세 가지 모습이 소개됩니다(20:2).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되었던 집, 애굽에서 건져내신 구원하시는 하나님(Redeemer)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셋째, 주 하나님 즉 창조주이시며 주권자되시는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의 복(20:24)이란 무엇일까요? 부귀영화, 만사형통, 무병장수 등일까요? 베드로 사도의 교훈에 따르면 그 복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며(18),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23). 그렇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진정한 복이며 상급입니다.

이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것이 애굽을 떠난 후 광야길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며 모든 필요를 채우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았고 애굽의 체제에 익숙해진 그들은 늘 애굽의 잊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강한 기운이 광야길에서도 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당겼습니다. 애굽을 떠났지만 애굽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 속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삶을 복되다 믿고 천국 소망가운데 살아갔습니다.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고, 재산을 빼앗기고, 무참히 처형을 당하고, 토굴과 암혈 가운데 살더라도 성도들은 자신들을 복되다고 믿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그 약속대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