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9-13

 

개미와 벼룩이 함께 지냈습니다. 개미는 평면위를 기어다니는 벌레이고 이차원에서 생활하는데 벼룩은 뛰어다니는 벌레이기 때문에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벼룩은 공간의 경험이 있지만 개미는 공간의 경험이 없습니다.

어느 날 개미와 벼룩이 함께 놀다가 벼룩이 툭 튀어 올랐습니다. 개미가 생각할 때 신비롭습니다. 벼룩이 함께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없어집니다. 벼룩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개미에게는 믿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개미가 볼 때 벼룩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벼룩이 실제로 존재하는 자기의 친구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개미는 아하, 나는 잘 모르지만, 벼룩을 보니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주기도문의 첫번재 기도에서 거룩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 물리적인 의미와 윤리적인 뜻이 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보다 물리적 개념이 우선합니다(김세윤, 주기도문강해).

거룩의 물리적인 뜻은 앞에서 예를 들은 개미와 벼룩의 비유를 통해 그 단면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개미는 공간의 경험이 없지만 벼룩을 통해 그 실존을 알게 되었고 벼룩이 옆에 있는 한 그 역시 공간의 이익과 자유를 함께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함은 하나님이 나와는 절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생의 의미를 믿고 알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 때부터는 우리의 삶의 본질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거룩의 이차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해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신, 그것도 우리의 이해의 한계에서 보여주신 내용만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와는 절대 다른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우리와 구별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 믿음으로부터 이차적인 거룩’, 즉 윤리적인 의미의 거룩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과 신비를 믿을 때에 우리 자신도 그러한 존재임을 믿습니다. 범상의 것에서 분리되어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가 되고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러한 상태를 가리켜 하나님께 바쳐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룩의 두번째 의미, 즉 윤리적인 거룩,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만일에 제가 아내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다면 아내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내의 존재는 헛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하나님은 반드시 거기에 임재하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의미이고 믿음입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불러 낼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경망스러운 생각을 할 수 있는 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공간의 다른 곳에 있다가 내가 부르면 달려오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살고 인지하는 세계에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공간에 충만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신앙입니다.

나의 몸이 지금 이곳에 있듯,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은 이곳에 임재하십니다. 내가 하나님!’하고 그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의 신비와 함께 하며, 초월자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존엄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 그 거룩하신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 풍요로운 영생의 은혜 앞에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