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9-12
한 형제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형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어린 동생이 장성할 때까지 10년 넘게 방 두 개의 좁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어렸던 동생은 성장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어느 덧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입대하는 날 아침 동생은 형에게 큰 절을 하며 편지와 함께 백만원이 들어있는 봉투를 부끄러운 듯 내밀었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어려운 시간 동안 힘든 내색 하나 내지 않고 부모님 대신 나를 이만큼 키워주어서 고맙습니다. 누구보다 형수님께 고맙습니다. 형님은 나에게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이제 장성해서 군에 나가는 동생을 품에서 보내는 시간에, 형은
아버지 없이 동생을 키웠던 세월의 서러움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어린 동생에게 그는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5년 나이 차이 남동생이 있지만 좋은 형 노릇을 못했습니다. 좋은 성품의 아들 둘이 있는데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 앞에서는 늘 미안함과 부끄러움 뿐입니다. 앞에 소개한 이야기에서 형의 모습은 대체된 아버지입니다. 우리들 삶의 주변에는 수많은 대체된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표현함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의
극히 일부를 보여주는 대체된 아버지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으로서 육신의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주기도문의 서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기초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은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주 전체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우주를 초월하는, 아니 하나님의 하늘에 비교하면 이 세상의 우주는 티끌처럼 작아지는, 무한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어딘 가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 안에 이 우주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분이어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주보다 작다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없습니다. 우주보다 더 크고 강하셔야 우주를 고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월의 의미입이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분이지만 치유와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오셔서 내재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지 않고, 높은
하늘 보좌에 홀로 계시기만 한다면 구원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내재하셔야 구원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170여회),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막14:36). ‘아바’는
아람어로 아기가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말로 한없는 신뢰와 친근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롬8:15-16, 갈4:6).
어린 아이가 더운 날 밖에서 신나게 뛰어 놀다가 집에 뛰어들어옵니다. 냉장고문을
확 열어서 시원한 쥬스를 꺼내 마시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습니다. 그럴 때 엄마 앞에서 예절을 갖추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제가 목이 마른데 물 한 컵만 마셔도 될까요?”하면서
정중하게 요청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철부지 아기에게 엄마 아빠의 것은 모두 내 것이며, 엄마의 사랑과 헌신을 확신하는 아이는 엄마 앞에서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무엇도 우리를 가로막지 않습니다. 부족한 경건, 죄로 물든 생활, 헌신적이지
못한 신앙…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자녀들의 기도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바 아버지’를
찾는 자녀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은 자녀들을 바라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아바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