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1-14
시지프는 신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끊임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무익하고도 희망 없는 일을 계속하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삶의 행복이 너무나 강렬하여 지옥의 형벌조차 무시할 수 있을 때, 삶은 슬픔이 됩니다. 바위의 무게는 견디기에 너무나 힘든 엄청난 비탄입니다. 이것이 바위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바위를 끌어안고 고뇌하던 시지프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는
어느 순간 눈이 멀고 절망한 자기를 이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젊은 처녀의 싱싱한 팔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성실한 시지프, 심지어 굴러 떨어진
바위로 내려가는 그의 가슴은 환희로 충만합니다. 시지프에게 바위는 더 이상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주는 ‘자신의 바위’가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바위, 일상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의 바위가 산 위에 있든 굴러 떨어지든 바위는 언제나 자신입니다. 신화의 마지막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시지프의 변명, 이제 목회생활 40년을
훌쩍 넘긴 지금 목사와 선교사로 살았던 인생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성직, 봉사, 희생, 정의 등의
단어에 기대어, 비겁하게 숨어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겁니다. 교회봉사라는
핑계로 많은 중요한 일로부터 도피했고, 성숙하지 않은 인격을 목회라는 동굴에 숨겨두고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산을 내려가는 시지프처럼 ‘그대로 괜찮았고, 보람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봅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기 때문에, 자식을 낳은 어미이기 때문에, ‘나는
평생 가정과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는 말, 교회를 위한 헌신, 국가를 위한 충성, 일을 위한 몰입, 정의를 위한 열정, 단지 그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종종 다른 길에 눈을 돌립니다. ‘내가
그 때 교수 자격시험에 통과했더라면, 공부를 끝까지 마쳤더라면, 더
좋은 곳에 이주했더라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내 팔자가 왜 이렇게 됐지…’ 가능했을
다른 삶을 아쉬워하느라 단 하나의 삶, 진짜 자기 삶을 살지 못합니다.
실현되지 않은 일들의 목록을 눈 앞에 펼쳐 놓고, 아쉬움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전도서는 ‘헛되다’라는
절규로 시작하고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1:2, 12:8). ‘헛됨’은
분명 전도서 전체의 핵심 단어입니다. 그렇다고 염세주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전도자는 그 ‘헛됨’의
정체가 ‘바람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파악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어서 남아 있는 어떤 것임을 말합니다(1:14-15).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헛됨과 절망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그 헛됨의 진실이 무의미와 허망함이 아니라 절대자의 실체임을 제시합니다.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암흑 같은 허무가 보는 이에게는 빛의 충만이 될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전도서에서 저자는 자연, 지혜, 지식, 희락, 소유, 성취와
수고 등 인생을 구성하는 대부분을 헛되다 말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그 ‘헛됨’과 마주하게 됩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을 느낄 때는 뼈가 마르고 살이 떨립니다. 그런 때가 찾아오면 전도자의 말을 기억하십시오(전2:26).
전도자는 종말의 허무함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헛됨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재건을 위해 철저히 해체하는 거지요. 필생의
노력과 열정에 지독한 허무가 찾아올 때, 전도자는 바로 그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다면 지독한 허무를 지나 인생의 보석들을 찾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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