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3-11

세모(歲暮), 한 해가 끝나거나 시작될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떤 질문들이 오갑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이 나에 대해, 내가 세상에 대해.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삶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의미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여행 중인 기독교인들의 질문은 궁극(窮極)적입니다. 궁극적이라 함은 우리가 가진 질문은 단순한 물음을 뛰어 넘는 보다 깊은 의미를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한 구도자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해보다 밝은 빛을 보게 되었고 그 빛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자신이 생각할 때 평생 신의 율법을 추구하며 실천했던 사람이었는데, 실제로는 그가 신을 박해하고 있었다는 인생 모순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 겁니다. 구도자는 그 순간 두 가지 질문을 신에게 던집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9, 22, 26장에 세 번이나 인용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회심 장면을 우화처럼 표현한 내용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중대한 인생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신을 추구하는 폭력입니다. 그의 인생 스토리를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럴 겁니다.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불평등), 신의 율법을 폭력적으로 배웠고, 폭력적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가두었고, 제도 폭력을 사용해서 이교도들을 처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가 과연 이러한 길 위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는 과연 구도자이기는 한 걸까요?

궁극원리(窮極原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학의 가설적, 부분적인 원리와는 다른 철학의 보편적, 긍정적인 제일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에서 과연 궁극 원리에 대한 관심은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최첨단을 향해 극한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현대 과학과 기술의 목표와 방향은 어디이며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초고속 경쟁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건지, 첨단 기술의 철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거품 경제의 비누방울들이 무질서하게 흩날리고 황폐된 환경과 인권유린의 쓰레기들만 뒹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방향을 잃은 첨단 과학기술의 현주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이 두 가지 궁극적인 질문은 성경에서 하나의 뜻으로 융합됩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은 어떤 의미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사람을 만나 예수님께 묻습니다(9).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때 주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사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역사에는 신앙의 의미가 공존한다는 뜻입니다.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산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의 인생 역사는 내 인생에 내재하시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로 채색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방향으로 정렬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미 카터는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누구나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재능을 타고 났느냐,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와 재산, 권력과 명예는 성공의 척도일 수 없습니다. 진리와 정의, 겸손과 봉사, 긍휼과 용서,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렀다면 그 사람은 비로소 인생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미를 주시하면서 최선을 다해 정진하십시오. 그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쁨과 확신에 찬 삶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