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8
‘종교의 진수’를 묻는 질문에 간디는 ‘원수라고 여겨지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인(仁)’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공자는 ‘문을 나서면 그 누구라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큰 손님 대하듯 모시는 것이며, 사람을 대할 때 신(神)을 대하듯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인 해탈의 경지는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 고등종교들의 궁극적인 추구는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 사상과 상통하며, 로고스는 만유를 움직이는 법칙을 말합니다. 이 모든 종교적 추구의
공통점은 인격적 존재가 아닌 우주적 존재 법칙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사상은 당시의
모든 지성인들에게는
매우 혁신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에서 로고스는
추상적이고 고상한
법칙이며 육체는
악하고 천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은
말씀이고 육신은
육신일 뿐이지,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사상은 수용
불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성탄의 심오한
진리를 전합니다.
성육신은 역사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음을 증거합니다. 적어도 거듭난 하나님의
성도의 인생에
하나님의 임재는
현실이며 구체적인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먼저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모든
신성한 의미들은
거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벧후1: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역사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의
생애에 시작하신
일들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주권, 다시 오심, 우리 삶의 산
소망이 되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안에 존재합니다. 그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이 되셨습니다(히5:7, 히4:15).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며 인간
예수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하나님 자신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인간 예수께서 승리하실
때 하나님
자신이 승리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예수 안에
들어와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안에 존재합니다.
매해 연어 철이
되면 우리는
급한 물살을
거슬러 인생
마지막 여행의
대장정을 떠나는
연어들이 연출하는
장관을 봅니다. 그들이 태어나 처음
내려왔던 길을
따라,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위해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시몬 베드로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접했다가
하나님의 신비로
부름 받는
궁극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깊은 데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평생에 익숙한
어떤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가 몸담고 살던
가장 익숙한
그것이 가장
악한 장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분연히 떠납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베드로의 삶을
찾아와 역사가
되는 순간, 베드로는 주님께서 내려오신
그 길을
따라 천국
여정을 떠납니다. 그 길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12:1)’ 세상의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음 당해야
했던 길, 그 길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찾아
여정을 떠납니다. 그 길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올라갑니다. 성육신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익숙한 것을
버리고 떠날
때 비로소
보이지는 않을까요? 평생동안 몸담고 있었던
익숙한 성품과
생각과 경험들을
떠날 용기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성육신이
나의 삶을
찾아올 때
그 길을
따라 천국여행을
떠날 용기가
우리에게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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