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10
복음주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세상에는 천국의 영광을 옳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설교했습니다. 간혹 생물학적 죽음의 단계에서 소생한 사람들 중에 자신들의 경험을 ‘천국 혹은 사후 세계’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에서 교리적으로 정의하는 천국과 영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천국은 가장
거룩한 기쁨과
하나님의 신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타락으로
인해 왜곡되고
불완전해진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온전하게 묘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엄마의 품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면서
있는 동안에
가장 큰
자유와 평안을
느끼듯, 성령 안에서
신자들은 천국을
그렇게 깨닫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곳입니다(골3:3). 감취어 있으므로
인간 언어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성령 안에서
신자는 그것을
깨닫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3:3,12).
믿는 자의 윤리, 즉 삶의 의미란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진
천국, 그곳을 성령
안에서 깨닫고
믿는다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선택합니다. 그들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신자들의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현대인들 중에는 심판이나
영벌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그
교리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싫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자청했을
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그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심판이며,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이
영벌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분해 내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 즉
영생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이 잊혀진
채 묻혀
있을 경우가
많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통해 보장된
이 영원한
약속이 실현되기를
갈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너무나 자주
성경을 잊은
채 세상의
일시적인 즐거움에
만족할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합당하게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삶의
의미입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기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거의 방종에
가까운 최고의
인권을 향유하면서, 덧없는 세상의 형적을
버리고,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영광을
진정으로 갈망할
수 있을까요?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영광을 진정으로
갈망할 수
있을까요? 에드워즈가 말한대로, 얼마되지 않는 세상의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무한한
영광과 기쁨의
중한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기독교적인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죽음이
온전히 정복되고
부활이 이루어질
그날을 갈망하는
믿음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찬란한 영광을
소망해야 합니다. 이런 갈망이 박해를
견디게 하고, 육신을 죽이고, 사탄과 맞서
싸우고, 몸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위해 전진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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