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42-58
인간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 인간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은 만족이 아니라 더욱 갈구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거라고 예견합니다. 인류는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기적처럼 줄인 다음 노화와 죽음 자체를 극복하면서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로 업그레이드할 거라고 말합니다.
과연 초고속 발전을
거듭하는 인공지능
기술과 생명공학은
인간이 죽음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점차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물리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면 인간은
영생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극복한다면 인간은
신이 되는
건가요? 이런 문답은
마치 목적지를
묻는 사람에게
나는 건강하니
괜찮다고 답하는
것과 같이
우문우답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영생을
인간 육체의
생명을 영원히
연장하는 것으로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죽지
않고 수백년
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까요? 우리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더 낫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요? 다른 한
편 그
자체가 지옥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성경에서 영생은 우리
생명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 완성은
반드시 죽음을
지나서 부활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신자는 죄를
지나왔고, 앞에는 죽음과
사망과 무덤과
종말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종말에서
열릴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 시점이 최초의
인간에게 주어진
영생의 약속이었습니다(벌코프). 진정으로 최초의 인간이
정직하게 유지되어
살았었더라면 보다
나은 삶으로
넘어갔을 것입니다(칼빈). 그것이 로마서 7:10에서 말씀했던
‘계명 즉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몸의
부활은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
주어졌던 미래상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상태로 복귀하신
것이며 그
부활의 상태가
신자가 궁극적으로
이를 소망의
자리입니다. 육체의 부활은
인간이 신이나
천사가 되기
위하여 인간이
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셨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최고의 영광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9문은 ‘그 분
안에서 우리의
몸은 이미
하늘에 있다’고 밝힙니다. 우리의 현재
육체는 하나님의
신비가운데 지금
천국에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부활은 지금
씨앗처럼 내
안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신자가 소망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삶의 한 가운데에서
고난과 죽음이
우리를 엄습할
때, 세상의 모순
속에서 신자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죽음 이후의
삶을 그리워하며
속히 죽기를
바랍니까? 그 죽음이란
어떤 건가요? 나비와 같이 무덤
위에서 펄럭이며, 영원히 살기 위하여
어딘가 머물러
있는 모습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종말의 시점에
폐기 처리될
쓰레기가 아닙니다. 변화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 안에
씨앗처럼 존재했던
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최고의 영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의 그
어떠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
각자의 모든
영광은 독특하고
다양합니다(고후15:35-41).
삶에 허무가 찾아올
때,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현재 우리
주변의 죽음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각자의
삶에 담긴
부활의 씨앗과
영광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홀연히 변화의
순간이 올
때 그것은
보석처럼 귀한
가치의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죽음은 무너지고
생명이 승리할
것입니다. 영광이 위로부터
우리의 삶
속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기다립니다. 이 빛이 우리의
완성되지 않은
생명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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