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1-5

2004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흥행에 성공하면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 장면을 향해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결말을 향해 갈수록 강도가 더해지며 길게 이어지는 폭력적인 장면들에 관객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관객들은 영화에 집중하면서도 태연하게 팝콘을 집어먹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그려내는 처참한 십자가의 처형 장면을 통해 사람들은 과연 십자가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참혹한 십자가는 과연 참혹함만 있는 걸까요?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이 아니라면 죄에 대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와 타락의 심각함을 모른다면 대속의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했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죄악된 성품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 무흠하고 법적으로 범죄 사항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죄의 증상과 죄의 근원은 다른 것입니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아기가 바깥 세상에 대해 무지하듯, 죄악 속에 있는 인간은 죄가 없는 세상을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앞을 없는 시각장애자가 빛이 무엇인지 없듯,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빛이 없는 사람은 죄의 처참함이 무엇인지 없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스토리는 단지 잔인한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의 장면에 불과할 겁니다.

사도신경 중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신앙고백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무감각 속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합니다. 우리의 영적 무감각이 간과하는 십자가의 신비가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는 가지의 버림 존재합니다. 무지몽매한 군중들과 간교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버림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과, 그러한 인간의 더러운 죄를 짊어진 하나님의 어린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모습입니다.

가지 버려짐은 서로 간의 엄중한 충돌로 이루어집니다. 버려지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되었으며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4).’ 이를 마디로 줄이면 너무나 싫어해서 쳐다보는 조차도 지겨울 정도로 싫어 버리는 상태 의미합니다.

무신론자는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지겹도록싫어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아래에 나오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3:20). 십자가에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버려집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버려집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짊어 지셨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진 겁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랑과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지겹도록 싫어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을 보이는 순간, 하나님은 세상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가장 싫어 버리는 곳으로 인간은 나아갔습니다. 은혜에 반항하는 인간에게 은혜는 너무나 하찮은 것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돌아섬과 조잡하고 미묘한 죄악이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고 현저하게 욕을 보이는 자리에서, 죄와 심판, 은혜와 사랑은 서로 엇갈려 만납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준엄한 심판은 예수님께 일어났고 우리는 저주를 벗어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