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4-6
1945년 8월15일은 우리가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힘없이 수탈을 당하다가 국권을 수복하면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기쁨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환희의 날이었습니다. 노예처럼 살던 국민들에게 해방은 글자 그대로 ‘복음’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던
역사적 환경도
비슷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시리아 제국의
막강한 힘에
쇠망하고 남유다
역시 멸망을
직면하고 있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전했던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는 분명
좌절하던 유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고난은 복음을 듣는
귀를 열어줍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고 살림이
윤택할 때는
상대적으로 복음에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극한 고난과 절망
속에서 희망이
강하게 요청될
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말씀이 인격화 되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면 이
세상에서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중요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기초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당하신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생애 전체가
고난’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7문은 “사도신경의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일은
그 시작부터
이미 고난의
행보였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생애
전체가 주님께는
치욕과 고난의
생애였습니다(빌2:6).
그렇다면 그의 삶은
온전한 고통과
슬픔만 있었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가 약한 육체를
입고 아기의
모습으로 가난한
부부에게서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찬송했고, 기쁨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인간의
고난과 슬픔의
현장을 찾아
갔을 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중풍병자가 생애 처음으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으며, 죽었던 자가
생명을 얻었고, 평생 소외된 채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사2:9).
그의 삶에는 고난도
있었지만 기쁨도
병행했습니다. 죽음도 있었지만
부활도 있었습니다. 인간 고난의 현장을
찾아 갔던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에는
승리와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 갔을
때, ‘고난 받는
종’ 그리스도의 생애에
하늘의 기쁨과
승리가 가시화됩니다.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가시화되었습니다. 천상의 그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의 고난을
통하여 하늘의
능력이 이
땅에서 ‘가시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에는
부활이 숨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삶, 고난 받는
종의 있었던
곳에는 고난을
행동하시면서 승리를
얻으시는 하나님의
향기가 존재합니다. 여기에 성도의 고난의
실존적 의미가
존재합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
무병장수 만사형통이
아니라 ‘성도의 고난’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복은
존재합니다. 천국의 능력이
화산처럼 분출하며, 희망을 가장 갈구하는
절망의 현장에서
바위를 깨고
지축을 흔드는
부활의 능력이
폭발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기둥처럼
우뚝 서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과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롬8:32).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고자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할
때(빌3:10-11), 고난 받으신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난의
현장에 성령으로
내재하시고 천국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에 성도 고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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