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6,20

마이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서 현대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에 의해 만사가 헤아려지는 ,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각이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슬며시 뒤로 미뤄 놓는 곳이 되었으며, 동기부여가 복음을 대신하고, 우리가 적절히 선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구속자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독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은 사도 베드로의 모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16).’ 당시 신자들의 신앙고백은 오직 예수였으며, 예수 없이 신앙고백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현대 교회들은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탐구하는 길에서 종종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성부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주 방향을 잃고 헤맵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탐구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은 일반 종교인들이 찾고 있는 신관념과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육체를 가진 사람이 목이 마르면 물을 구하듯,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본능에 초월자 신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성령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역시 자주 방향을 잃고 헤맵니다.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적인 관심을 내재하시는 하나님, 경험의 신앙으로 옮겨서 신앙적인 신비 경험에 초점을 두려고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증거하고 알게 하시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일입니다.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신앙의 신비 경험에만 몰두하고자 ,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신비주의로 빠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신비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17세기 슐라이어마허의 신비주의가 철학의 이름으로 태동하기 훨씬 이전 이미 동굴시대부터 신비 현상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신비 경험을 기독교 내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정의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리스도 없는 신비 경험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부 하나님을 아는 길은 없습니다. 만일에 그런 시도를 한다면 추구의 목표는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일반 종교가 추구하는 신이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십계 1계명에서 철저히 금하신 바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없이 성령 하나님을 아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신비 경험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비 경험은 성령의 사역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믿게 됩니다(20). 예수라는 길을 따라 우리는 곳에 이르게 것입니다.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연합하는 방식으로 우리 역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게 것입니다.

날에 우리는 지고의 신비를 만나게 겁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같이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이끌어내는 종교적 신이 아니고 우리의 감각으로 찾으려는 신비 경험도 아니고 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것입니다(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