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
1979년에 발사된 천체 탐사선 보이저1호가 지구로부터 61억 킬로미터 밖으로 멀어져 갈 때, 지구를 포함한 6개의 태양계 행성들을 촬영했습니다. 그 사진에서 지구는 거대한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했으며,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고, 인간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그 점위에서 존재했다고 당시 팀장이었던 칼 세이건은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사도신경의
내용에서 ‘하늘과 땅’의 의미가 우리에게
주는 깊은
감동과 울림이
있습니다. 우주 속에
‘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의 사진을
보면서 자연의
웅대함과 역사의
허무를 마주하던
한 천체학자의
겸손과 같은
느낌이라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늘과 땅’을 니케아신경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독교 초기 성도들이나
교회의 신앙고백에서의
‘하늘’은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하늘’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는데 그들에게
하늘은 세
층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하늘은 대기권, 둘째 하늘은 해나
달이 있는
우주 공간,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입니다(고후12:2).
신학자 바르트의 경우
사도신경의 천지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천지의 담론을
충분히 함의하는
합리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상할
수 있는
것에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정신세계나
존재의 의미
등이 포함되며
과학자들이 말하는
물질과 물리의
세계가 포함됩니다. 적어도 인간의 모든
‘상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상할 수
있는 것, 보이는 것’이며, 사도신경에서는 땅에
속한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굳이 구분하려고
했던 질료와
형상, 보편과 개체, 존재와 물질을 나누는
경계는 기독교
교리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 모두는 ‘땅’에 속한
것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안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사람이 이
지상적인 기원이
아닌 또
다른 기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갖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땅이 하늘 아래
있고,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지상적인 것들보다
더 많은
것이 사람에게
속한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 경계선에
존재합니다. 땅 위에
있고 동시에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땅의 존재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높이와 깊이로
땅을 포함하는
동시에 관통하여
들어오는 관계가
존재한다면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세상이 존재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역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결심과 작정은
세계가 있기
전에,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안에서
이미 존재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비문에 새긴 기록’처럼 분명하고 신비롭게
사람안에 존재합니다(고후3:3-5).
창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초의 언행일치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에
존재했고 그
생각의 실천은
피조된 땅에
존재했으며 하나님의
언약은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 무한한 것과
제한적인 것의
만남과 사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초월자
하나님은 내재자가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창조는 우리의 삶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이유이며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천국을 향해
용기 있게
걸을 수
있는 이유이고,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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