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9

김춘수 시인의 이라는 시에는 이런 싯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모를 들꽃이 깊은 산중에서 혼자 꽃을 피우고 시듦에 의미를 두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들꽃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고 시인이 감동을 받는다면 때부터 꽃은 시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겁니다.

창세기 2 19절에는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계 맺음이라는 단초를 통해서 창조의 본질과 의미를 찾아가는 중요한 출발점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성경의 관점에서 세상은 인간이 있으므로 존재 의미가 있고, 인간은 하나님이 계심으로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는 존재할까? 우주에서부터 우리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등은 지성이 있는 사람이면 피해 없는 질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우주가 설계나 설계자 없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주가 초월적인 의미 없이 오로지 자연적인 사실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세계관의 문제가 됩니다.

모든 세계관은 각각의 관점에서 세계의 기원을 이해합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과 목적과 역사의 진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에 의해 자신의 가치와 목적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또한 알게 됩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세속적인 세계관들과 달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의미와 적절성을 부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체와 현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인 행위, 천지의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아버지이자 천지의 창조주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피조세계는 그것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드러내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우주와 물질 세계를 하나님은 창조하셨지만 우주와 물질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앙은 물질 세계의 한계에 창조주 하나님을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결과물인 물질세계를 뛰어 넘어 창조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만물을 믿는 것이 아니고 만물 속에 있는 사람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숭고한 의미를 바라봅니다.

그런 면에서 창조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존경과 두려움과 감사 안에서 가장 강하게 믿고 싶은 진리입니다. 스스로 자존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뭔가 부족한 것처럼우주와 인간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가장 복된 상태의 창조를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창조세계보다 창조하신 하나님을, 물질보다는 의미를 묻습니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 이해할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안에 있을 뿐입니다. 과학은 존재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지 최초의 시작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계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적어도 우리 자신의 존재가 아닌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에 내가 있고, 그것의 기이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