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16-26

2020 경제성장률 2.1% 한국경제는 본격적인 저성장 구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고성장을 통해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고 나면 경제성장률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제조업 가동률도 70%대로 금융위기 이후 최저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소비와 투자 민간부문 전반이 점점 둔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67달러였습니다. 60여년이 지난 2014 기준으로 2 8,180달러, 420배가 뛰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눈부신 성장입니다. 그러나 2011년부터 한국의 연평균 경제 성장율은 멈추기 시작했고, 우리의 사회는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청년 실업난은 유례없이 심각합니다. 자식들이 독립할 없으니 부모는 돈이 줄어듭니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이런 무력감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고성장시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일단 인구가 줄어들고, 일할 사람이 없어지며 돈을 쓰는 사람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저성장을 새로운 경제 질서로 수용하고 사회 시스템과 개인의 체질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며 율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으므로 사회적 존경을 받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러한 청년이 고뇌에 싸여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요청하십니다.

주님께서 청년에게 요구한 것은 마디로 자발적 겸손입니다. ‘자발적 겸손이란 현대적 용어로 자발적 가난, 자발적 불편, 버림으로 얻는 자유, 나눔과 공유의 경제, 복잡한 걱정 덜어내기등을 의미하는 미래인들의 생활 양식으로 표현되는 말들입니다.

부자 청년이 느끼는 삶의 무의미성은, 마치 고성장 시대인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어가며 악착같이 일구어 풍요시대가 놓쳤던 삶의 의미 겁니다. 이제는 고성장 세대의 부산물들이 오롯이 지금의 청년들, 미래인들의 몫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의 삶에 이전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 있고, 열심히 일하면 승진할 있다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60 전에 비하면 우리는 분명 먹고 삽니다. 그런데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청년들에게 예전처럼 소비를 부추기고, ‘앞을 향해 전력 질주하라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성공이라는 시대에 맞지 않는 허상을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개인은 행복할 없고 사회의 자원은 고갈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 가난 요청하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발적 가난 생존이 힘든 사회적 약자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 가난으로 사회에 기여를 있는 계층은 부자들입니다. 기술과 과학, 경제의 발달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수준이 크게 높아진 사회의 중산층 또한 여기에 참여할 있는 사람들입니다.

새우젓을 팔아 1억원의 장학금을 기부하는 할머니는 자발적 가난 본질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르신은 자선이나 희생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고, ‘그냥이라면서 거액을 헌금하고 종종 걸음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자발적 가난과 일맥상통하는 모습입니다. 모은 돈으로 물건을 소유하는 부유한 빈자보다 가치 있는 일에 쓰는 가난한 부자 선택한 것입니다.

성경의 자발적 가난은 자본주의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의 격차가 커지고 물신주의가 팽배할 사회를 수정하고 보정하는 역할로 작용합니다. 이는 저성장 시대 우리 미래 생각의 모델이 있습니다. 미래의 명품은 고액의 소비가 아니라 자발적 겸손 명품을 대변하게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