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21-28
나니아 왕국에 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통치자 아슬란이 자리를 비운 사이 흰색 마녀가 들어와 백성들을 돌조각 상태로 가두었고 왕국은 차가운 겨울에 묻혔습니다. 어느 날 합법적인 통치자 아슬란이 돌아와 마녀는 추방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슬란의 친구 중에 황제의 반역자가 되어 마녀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는 겁니다. ‘태초의 심오한 마법’에 의해 그들은 마녀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돌조각으로 변한 백성들의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통치자
아슬란은 어찌된
일인지 아무런
힘도 없는
듯 마녀에게
끌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처참하게 죽게
됩니다. 아슬란을 죽인
마녀와 졸개들은
온갖 해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떼 지어
떠났고, 왕국의 친구들은
좌절했습니다. 이 때
쥐들이 나타나
아슬란을 묶었던
밧줄을 끊어
주었고, 아슬란은 잠에서
깨어나듯 죽음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놀란 친구들에게 아슬란은
말합니다. 마녀는 ‘태초 이전의
더욱 심오한
마법’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결백한 자가 반역자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돌탁자는
깨지고 죽음
그 자체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옛 죽음을 이기는
원리는 힘(폭력)이 아니라 희생의
죽음이었던 겁니다(C.S.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2권).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악과 고난에
짓눌려 있는데
성경은 그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을 반역하는
욕구와 행동입니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애초부터 구원의
이유도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종교나
사상, 문명 낙관론
등도 있었지만, 인간의 지성과 고도의
기술 문명은
종종 인류
역사에 일찍이
보지 못한
참상을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서, 초월자의 무한한 능력과
은혜로부터 구원의
힘은 와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복음 운동을
종결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
구원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이 믿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한
인간의 종교적
행동으로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룬 구원을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조건입니다.
믿음은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내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명시적이어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외적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둘째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내포하지
않은 믿음은
구조상 헛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이
실재화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때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제자도는
고난의 옷을
입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복음은 내면화되고
믿음은 실재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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