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24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기독교회 내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장기간 실내예배를 모일 수 없는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거의 일년간 교회의 모임을 온전히 갖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 각자는 예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자개인과 지역교회에 있어서 예배는 과연 무엇일까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신앙적 성찰의
계기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생활이었습니다. 전쟁에 패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국민 대다수가
바벨론 포로가
되면서, 더 이상
성전 예배가
불가능 해졌을
때 그들은
말씀을 통해
신앙적 성찰을
이루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차제에 우리는 같은
질문에 직면하여
진지한 답변
요구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부 교회는
예배 중단의
책임이 마치
정부에 있는
양, 반정부 감정을
부추겼고, 죽 끓듯
떠드는 이단사설과
음모론을 교회
깊숙히 들여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는데 우리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4:24을 근거로 우선
예배에 관련한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본
후에 진정한
예배를 위한
기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첫째, 예배의 우상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부르면서
이방신전에서 제사하듯
뛰놀았고(출32:4)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방식과
기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이교적 요소나
인간적 욕망이
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예배의 형상화를 금해야
합니다. 칼빈은 교회
건물에서 십자가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적 셩상이나
상징들을 제거함으로
깨끗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질은
우상숭배를 피하는
모든 노력에
있어서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결코 가시적
형태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배
회복을 위한
종교개혁가들의 기초였습니다.
셋째, 예배의 형식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요소에 주술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신자의 신앙
고백적 예전이지
그 자체에
능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예식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넷째, 예배를 신비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향하지만
신비적 현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개혁교회 예배의 기초는
오직 성경과
말씀 선포에
있고,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하게 하십니다. 예배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있지
않다면 ‘영적이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예배’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기복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예배의 형식이
올바르다 하여도
마음이 없고, 진리에 대한 순종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아모스5:21-24). 성도의 삶에
있어서 예배는
한 장소나
시간 또는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고립되거나 밀려나서는
안 됩니다. 이기적이고 육적인 삶을
살면서 말로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행위는 끊임없이
예배하는 삶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씀은 개혁교회
예배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영과 진리’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성령과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개혁교회의 예배의
중심은 ‘오직 성경’이며, 모임의 중심은 언제나
말씀 강론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이 전해질
때 교회를
이루신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을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엡4:3)’하시고, 말씀이 전해질
때 그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시는
신비적인 연합이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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