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서 배우는 건강의 지혜
빌립보서 3:10-14
지난 주 저에게 좀 부끄러운 의료 기록이 시작되었습니다. 닥터께서 저에게 고지혈증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을 주신 일입니다. 저는 비교적 건강했지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므로 운동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는데 잘못된 습관을 바꾸지 못하고 게으름 부리다가 결국 약 처방을 받게 된 거지요.
도로에 위험 경고판이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주의하게 운전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건강에 적색 불이 켜졌는데도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태만하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백해무익하다는 식품을 먹는 것도 모자라 폭식까지 하고, 운동이 필요하다고 경고를 해도 끝까지 고집부리고 앉아 있고 누워 있고… 참 미련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에 관하여 최근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2016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생물학자 오시노리 교수에 의해 발견된 ‘자가포식 Autophagy’ 원리와 하버드의대 노화방지 프로젝트의 수장인 데이비드 싱클레어 박사의 최근 저서 ‘노화의 종말’입니다.
자가포식이란 세포가 분해되면서 생기는 세포 노폐물을 세포 스스로 재활용하는 과정을 일컫는데 신체 에너지를 제공하며 세포 재생의 토대가 됩니다. 오토파지라는 유익한 작용은 우리 몸에 외부 단백질 공급이 중단될 때 활성화되는데 예를 들어 간헐적 단식이나 열량섭취 제한 식단 등입니다.
싱클레어 교수는 ‘노화의 종말’에서 노화를 질병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그는 노화를 늦추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면서 80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하고, 위험에 도전하는 아버지의 예를 들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재설정하는 건강한 장수를 권합니다.
삼라만상에 약동하는 생명현상 앞에서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생명에 대한 감사와 존엄을 느낍니다. 그것이 만물에 담아두신 부활의 단초라면 우리는 날마다 부활을 숨쉬고 부활을 경험하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활은 분명 죽음 이후에 만나는 신비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미래는 현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종말은 반드시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의 삶에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은 미래인 동시에 현재에 시작하는 가장 강렬한 실존적 희망입니다. 신자에게 미래는 절망으로 이어지는 숙명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신 숭고한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오늘의 희망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는 말씀은 그 부활의 현재성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포함합니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부활 생명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지금 나에게 그 부활의 생명이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씀에는 부활이 단순한 미래 사건 만이 아니라 지금 가져야 하고 그래서 지금부터 지속되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부활에 대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아주 강렬한 삶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단어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획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방법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하여 삼라만상에 담겨있는 회복의 지혜에는 부활의 단초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실천해보십시오. 운동과 절제는 힘든 일이지만 건강을 위해 실천한다면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우리는 고통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 후에는 더욱 강렬한 회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로 가는 길은 기쁨으로 걸을 수 있는(enjoyable)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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