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24-29
인간은 ‘숙명적으로 종교적인 존재’라고 합니다(벌고프). 사람이 죄로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이므로 유전적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적 성향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지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골로새서 1:26절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했습니다. ‘만세’는 ‘어떤 특정한 기간이나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며 ‘만대’는 인간
세상의 세대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
역사와 자연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과 성취가
자연인에게는 감추어졌고, 성도들에게는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자연세계의
법칙이나 사람의
오감이나 이성적
체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지며, 그 비밀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절대
타자입니다. 우리가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한, 우리는 그분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여야
합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신비’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신비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성도들에게만
열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자연적이거나
이성적인 접근은
근본적으로 차단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에서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요
율법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맞닥뜨린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역사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을 추구하려는
다양한 신비주의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연에서 신적 존재를
찾으려 하는
자연 신비주의, 명상과 초지식을 통해
신을 추구하려는
철학적 신비주의, 기적이나 영매를 통해
신을 만나보려는
기적 신비주의, 혹은 고행과 금욕을
통해 신성을
이루고자 하는
금욕 신비주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이교적
영향을 입은
신비운동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롬3:23)’ 그 결과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엡2:1)’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죽어
있는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어 있는 나사로에게
오셔서 그
주권적인 능력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도움을
요청해서 살려준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관한 한
그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께
만 있습니다.
어떤 인디언에게 생일을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생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봄에
평야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 태어났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가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태어난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듭남은 보이지 않는
신비이지만 결과는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이후
우리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영으로 난
사람’ 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깁니다. 중생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영적 실재입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의 빛으로부터 숨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눅19:10), 사람들은 빛을 피하여
달아납니다(요3:20).
신앙은 신비의 축을
가지고 있지만, 신비적 경험과 추구하는
노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난
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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