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10-11
성탄절에 나누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한밤중에 천사가 양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천사가 전해준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기쁜 소식’은 ‘복음’입니다.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헬라어는 그리스 문화에서 보통 최전방 전쟁터에서 전령이 가져오는 승전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와 세상에 대한 사명을 가리키기 위해 이 단어를 차용해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배경 때문에 성경에서 가장 많은 오해가 일어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전쟁터에서 가져오는 승전보’가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인데, 그것이
성경에서 선포하는 복음은 아닌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실 때, ‘복음을 선포하심’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마4:17,
막1:14-15, 눅4:18-19).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종종 ‘복음’에 대한 오해가 일어납니다.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한 복음, 즉 가난한 자에게 전해질 복음은 ‘주의 은혜의 해(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희년)’이지 ‘돈이 많이 생겨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세계는 마치 감옥에 갇혀 고생하는 사람에게 석방
소식을 전해주는 것과 같다는 뜻이지, 실제로 죄수들을 무작정 탈옥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마치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것’처럼 감동적인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아닌 것’과
‘진정한 의미의 복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 점에 있어서 언제나 분명했습니다. 로마서 1:16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천명합니다.
그리고 병행해서 가르치는 말씀 중에는 ‘다른 복음은 없으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경고합니다(갈1:7-8).
같은 이해의 선상에서 일부 혁명운동이나 민중해방운동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으며, 같은 관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내적이나 외적인 치유운동도 역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종교, 영성운동,
인생철학과도 구별됩니다.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복음이 지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을 포함하면서도 훨씬 광대 무궁하며, 복음의 세계는 하나님의 통치 세계 전체에 이르며, 결코 이 세상에
국한될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자기의 내면 세계의 추구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우리를 불러내시는 하나님, 우리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의 초점을 세상에 두게 되면, 복음의 영광은 가려지고,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롬1:16) ‘미련한
것(고전1:18)’이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세상의 헛된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알곡과 가라지, 심판과
구원이 구별됩니다. 십자가, 세상의 미련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것이 되고,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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