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탐내지 말라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탐심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진급하여 상급자가 되었다면,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먼저 성공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시샘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까요? 이웃의 새 자동차를 부러워한 적이 전혀 없다 거나, 형편은 안되지만 최신 유행하는 명품을 가져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명품점을 기웃거린 적이 전혀 없을까요?

탐심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인데 불현듯 떠오르는 경건하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을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탐심은 죄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인격으로 그러한 감정을 다스리고 실제적인 범행을 억지하기는 하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까지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오히려 인간이란 본래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이 계명이 십계명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마음에 욕망을 품는 것 만으로도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일깨워 주셨던 것처럼, 열 번째 계명은 같은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물을 탐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실제로 이웃의 생명과 아내와 재산과 명예를 도둑질한 것과 다름없이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선지자는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고백한 것이지요(64:6).’

십계명의 각 계명들은 각각의 특정한 가치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권위와 순종, 생명존중, 결혼과 가정, 소유와 경제, 진실과 명예 등입니다. 열 번째 계명 역시 만족과 행복이라는 가치를 기초로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만족은 소유로부터 오는 수동적인 감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4:12-13). 여기에서 자족이라는 말은 물질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하는신령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은 이 세상의 물질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음 창세 전에 택하신 구원이며, 우리를 씻어 거룩하게 하심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음이며, 값없이 주신 은혜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족은 물질을 부정하는 가난도 아니고, 물질에 집착하는 부요도 아닙니다. 은행 계좌에 저금한 돈이 한 푼도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자족의 기초는 신령한 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풍요로와 지고 만족하게 됩니다. 가난하더라도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고, 부하더라도 그 부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딤전6:6-12).

이방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급한 종교적 개념은 예배와 부, 순종과 물질적 번영을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한 복은 가난도 부도 뛰어 넘습니다(5:3-4).

열 번째 계명탐심을 갖지 말라는 명령은더러운 옷과 같은 우리의 의를 보여줌과 동시에하나님의 신령한 복으로 행복한 삶을 살라는 복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에 물든 기독교는이 세상에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사회가 풍요로울수록 고난의 신학이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신자가 과연 신령한 복에 대한 확신으로이 세상의 탐심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탐심은 행복을 이 세상의 것으로 결정하게 만듭니다. 탐심을 뛰어 넘으면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동시에 복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 안에서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열 번째 계명이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