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10-22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는 많은 병으로 고생하다가 암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 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습니다.”
질병은 누구에게나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병은 그녀에게 인생의
깊은 통찰력과 넓은 지평을 여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고난은 어려운 일이지만 때로 새로운 일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유대인 사울이 전도자 바울로 변하는 전환점이 소개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홀연한 빛’ 가운데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만, 그 빛때문에 그는 시력을 잃습니다. 그 후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 데, 그 때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과 인생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미래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병리 현상의 비늘을 스스로 벗어내야 합니다. 이슬비에 옷이 젖듯 병든 사회 속에 교회가 생각없이 머물러 있는 동안 교회의 존재 의미는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선교는 제국주의의 동반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은 세상의 성공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 그 긴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분합니다. 그 기준은 ‘자기부인’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인간의 욕망이 부인되어야 한다고 교훈한다면 고등종교라고 구분합니다. 그런데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는, 예외없이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첫째, 성직자의 수가 급증합니다. 종교에
자기부인이 실종되고, 성직이 모든 사람이 탐내는 세속적 직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교훈과 실천이 올바른 종교라면 성직은 존경은 받지만 세상적인 인기는 없어야 맞습니다. 둘째, 종교기관이 급증합니다. 셋째, 신앙의 기복화가 생깁니다. 늘어나는 성직자와 종교기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결과가 종교의 기복화입니다. 넷째, 종교단체의
이해집단화 현상입니다.
사울은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고, 당시 유대교는 고등종교 타락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타락해 있었습니다. 온 천지에 성직자가 넘치고 있었으며, 그들은
철저한 이해 집단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잔인무도한 로마정부와 밀착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좇는다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성경적인 비전은 세속적인 야망과 다릅니다. 야망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이고 살인적입니다. 야망의 성취를 위해 모드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합니다. 그 경쟁구도 속에서는 단지 몇 사람만이,
그것도 잠시만 행복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불행해지고 소외됩니다. 그러는 동안 사회는 모든 면에 걸쳐 자정능력을 스스로 상실합니다. 이것이
사울이 성장한 환경이었고, 이제는 그가 그런 사회의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슬픈 영적 현실을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신앙과 가치의 묵은 비늘을 벗고 새로운 전환을 겨져 올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시대의 문화 변천과 함께 교회의 모습도 자연히 바뀌게 마련이지만, 교회가
가진 진리와 거룩성은 변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근본적으로 개혁적이라는 말은 변하는 역사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교회는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개혁성을 가진 신앙인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동시에 변화에 주도적입니다. 신앙에
대한 깊은 확신에 머물면서도 깊은 영성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미래지향적이고 수용적입니다. 신앙의 묵은 비늘을 벗고 하나님의 선한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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