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5:1-12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은 동유럽에 임박한 변화에 대응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래에 다가올 독일의 재통일의 기회를 예측하고, 그에 필요한 안정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의 예견은 통일을 조국의 화합과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동유럽 전체의 개방과 격동의 시대에 유럽의 변화를 주도하며 공헌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성경의 시간 원리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우리의 미래에 분명히 예견된 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언제나 침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신비’로 남겨두셨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를 두고 수많은 미래 예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디지털 경제, 유통의 온라인 재편, 탈종교화, 정부불신
증가, 기업정부 등장, 등등…’ 거기에 왜곡된 종말론과 각종 음모론, 심지어는 가짜뉴스들까지 난무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생활에도
교회의 목회에도 많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가
신앙의 게으름과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질 거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내지만, 사실상 교회가 여러가지 이유로 모임을 갖지 못했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도덕적 타락 또한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원칙과 목적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변화무쌍하지만, 그 속을
관통하고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교회는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타락한 경우들이 많았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 역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에 역사속에
존재하는 교회가 복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으며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해가는 인류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각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는 데, 베스도의 법정에 섰던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세 가지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갖고 있는 일관성과 완성지향성, 그리고
공공성입니다.
일관성: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선교여행이 마지막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체포를 당하고 고통을 맛보고 죽음을 당할 거라고 예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하듯
나아가는 바울의 이유는 그의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그 방향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일”입니다(행20:23-24)
완성지향: 지금 자신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은 모두 자신의 친구이거나 가까운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성장했고, 같이 행동하는 동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은 배신자였고, 그들은 자신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의 변증은, 유대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전인격적이며 완성적이여야 합니다. 치우쳐서도 안되고 부족해서도 안됩니다.
공공성: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변증의 핵심은 기독교가 로마정부의 반역자가 아니며, 오리려
공적 유익을 가져오는 종교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복음은 공공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와 적대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세상과 타협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일이 아닙니다.
분명하지만 불확실하고, 게다가 임박해 있는 미래 변화를 두고 신자는 복음의 방향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두운 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에게 올바른 방향은 곧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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