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1-10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기회와 행운의 신입니다. 제우스의 막내둥이 카이로스는 앞에는머리카락이 많지만 뒤에는 없습니다. 기회가 앞에서 올 때는 잡을 수 있지만, 지나가고 난 후에는 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등과 발목에 날렵한 날개가 있어서 빨리 움직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의미입니다.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었습니다. 기회를 잡으려면 저울과 같은 분별력이, 칼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헬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말; ‘크로노스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일정한 단위로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연대기를 뜻하는 단어크로니클’(chronicle)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으로서 이후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인생의 시간과 사건에는 언제나 카이로스의 기회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가 하락한 기회입니다. 그러나 저울 같은 분별력과 칼 같은 결단력으로 잡지 않는다면 한 순간의 크로노스로 남기고 덧없이 흘러갈 뿐입니다. 신자에게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카이로스와 같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미래의 불확실성이 사회에 먹구름처럼 드리울 때, 여지없이 등장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미래 불안을 담보로 신앙 생활의 기초를 뒤흔드는 거짓 복음입니다. 기독교회는 교리 특성상 이러한 거짓 교훈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성경은 종말의 시간과 일정에 관심을 둔 적이 없습니다. 재림신앙을 가진 신자의 삶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가 갖고 있는 종말 신앙이란 환경과 역사의 해체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종말신앙은 오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동기와 힘을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2,000년전 팔레스타인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오늘 나에게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이 되며 하나님의 빛이 되어 살아가도록 힘을 줍니다. 부활사건이 부활신앙이 될 때는 그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 오늘 나의 삶은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신자에게는 시간의 질이 바뀌는 변화가 옵니다. 역사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모든 시간에 의미를 줍니다. 한 사건의 의미가 모든 사건을 채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나의 삶을 채우게 될 때, 우리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게 됩니다(고린도후서15:31).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던 사도 바울은 재림과 종말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의 현재 삶에 대해 언급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2-34)

종말신앙을 살아가는 신자는 종말의 연대기적인 시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종말의 뜻을 갖고 있으며, 그 소망은 매 순간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10).

현재 세계적 대유행 중에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는 거대 쯔나미처럼 밀려들어와 사회의 다양한 기초들을 일순간에 초토화하는 느낌이 듭니다. 고통이 있었지만 교훈도 발견합니다. 전쟁도 테러도 아닌 대유행 전염병은 아군 적군이 없고, 국경도 의미가 없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는 아마도 많은 변화가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판데믹은 우리에게 카이로스가 될 것입니다.

역사가 남긴 교훈에 하나님의 기회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선한 변화와 새로운 전환이 오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