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16
여행을 하다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 감동하고 장엄한 풍광을 보고 감격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집에 가고 싶습니다. 여행에는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이 있지만, 가정에는 안정과 휴식이 있습니다. 여행 길이 즐겁다 해도 여행길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세상의
여행길에 있는
우리들에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본향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지만, 그 약속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 전함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이며 복음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 여행길에는 목표가
있고 결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여행자가 돌아갈
집이 없는
듯 행동한다면
바보같은 일입니다. 타락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시102:25-27)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며(막 13:31), 인간의 영혼이
영원합니다(살전4:16-17).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행위가
악하므로 빛으로
나오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유익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지붕으로 피신한
아이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습니다. 바로 밑에 아빠가
손을 벌리면서
말합니다. ‘아가야 아빠에게
뛰어내려, 아빠가 안전하게
받아 줄게.’ 아이가 아빠의 품에
뛰어내리고 아빠의
품에서 아이는
다시 안전합니다. 만일에 아이가 아빠를
믿고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그대로
위험에 처해
있게 될
겁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이치입니다. 믿음이란 ‘천국가는 도장
찍기’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행동한다
함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들도 간혹 하나님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언제나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지 않으실까? 왜 때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나약하게
보일까? 하나님의 은혜는
있기는 한
것인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하나님과의 이
깊은 단절감은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자기를 부인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존재와
명령을 몰라서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몰라서 동생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제사의
결과 때문에
동생을 질투하여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 대제사장 가야바, 총독 빌라도가 신의
존재를 몰라서
악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면서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주장하는
‘자기’입니다.
예를 들어 햇빛을
생각해 봅시다. 구름이 있는 날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만일에 햇빛이
없는 곳이라
어두우면 밝은
곳으로 나오면
됩니다. “혹시라도 해가
없어지면 어쩌지? 왜 해는 밝게
빛나지? 내가 그
빛을 계속
받을 수는
있을까?”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의 에너지가
없다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필요하면 동굴에서
나오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함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이미
있으며, 천국 본향이
있다는 증거는
이미 우리의
양심에 있으며,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이미 우리의
생명에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이전에는 우리는
잃어버려졌으나 지금은
되찾아졌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하나님의
빛으로 하나님의
안식으로 나오셔서
그 유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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