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4-20

 

어느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간질병을 가진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고쳐달라 했지만 치료하지 못하여 예수님께 나온 겁니다. 예수께서 아들을 치료했을 제자들이 질문합니다. ‘우리는 고치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답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과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믿음을 갖고 병든 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고쳐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이 움직임은 고사하고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에는 회의가 찾아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고치지 못하는가?’

가장 중요한 문제요 장애물은 우리 삶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잘못된 세계관이며, 죄와 타락의 영향들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죄성과 부패가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갖는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어느 임금님이 행차를 하다가 다리 밑에서 구걸하는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왕은 소년을 데려다가 자신의 아들로 입양을 했습니다. 소년은 하루 아침에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지의 습관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왕자의 그는 아직 거지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신자의 신앙과 삶도 같은 이치가 적용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 신자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고, ‘신의 성품 참여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익숙해 있는 옛사람의 죄성이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의 거룩함으로 대체되어 거룩함을 이루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영적 투쟁의 여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에게서‘인간의 무력감은 한계성에 대한 학습된 암시의 결과’라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조련된 코끼리예를 들겠습니다. 코끼리는 몸집이 가장 동물이며 가공할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끼 때부터 다리를 기둥에 묶어 두게 되면 코끼리는 장성한 후에 기둥에 묶지 않고 밧줄만 걸어 두어도 반경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산을 옮기는 믿음 신비가들이 부리는 초능력처럼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생각이나 본성에서 자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믿음의 인위적인 측면 성경은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주시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단계에서 경험하는 믿음의 성장 또한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해주지 않으시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인위적인 믿음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옮기는 믿음 철저한 자기 부인(9:23)’에서 시작하며, 신자의 완전한 순종과 신뢰에서 성장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며, 믿음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2:20). 철저한 자기 부인 완전한 순종으로 산을 옮기는 믿음 만나 보십시오.

만일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바른 신앙이 있다면 산을 옮길 있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9:32). ‘내게 능력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있다(4:13)’ 믿음이야 말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병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