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6:1-12
어떤 사람이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 앉아있습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 옵니다. 그 사람은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지기 보다는 ‘시간 죽이기’를 선택합니다. 괜스레 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그저 이리 저리 다녀봅니다. 그것도 싫증이 나는지 돌 위에 앉아 바닥에 낙서를 해봅니다. 그러다가 시계를 들여다보기를 반복합니다.
하이데거는 위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제 올지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삶이라는 공허 속에 놓여 있는 존재이며 우리의 일상이란 시간
죽이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며, 잡담을
하고, 애매하게 행동하면서 서로서로 동질화를 꾀합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남들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은 퇴락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궁극적인 질문을 마주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세상사람으로 살 것인가?’
오늘 성경에도 비슷한 내용들을 중복해서 보여줍니다. 모든 소원에 부족함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받았으나 그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 백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 수고하여 필요한 음식은 얻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식욕 등입니다. 많은 수고와 성공과 번영이 행복을 가져오리라 기대했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내면의 만족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행복과 성공 사이의 거리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보통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행복과 성공은 같은 곳에 있습니다. 그럴거라는 환상 속에서 우리는 무던히도 많은 애를
쓰면서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궁극에 이르렀을 때, 즉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에 이르렀을 때 기대했던 행복은 거기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을 허비했다는
생각, 인생 무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행복과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성공한 인생’이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세상사람들이 ‘성공한 삶’을
말할 때 기독교인들은 ‘완성된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성된 삶’은
미래인 동시에 현재입니다. 신자에게 그 모든 것은 과정 속에 있습니다.
거듭남으로 시작된 성도의 생명은 종말에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겠지만 지금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그 생명가운데 살아갑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한 일이지만, 또한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순종의 삶으로
우리의 자의식에서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함께 끊임없이 지속되는 순간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삶’은 거듭남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신자는 헛된 ‘성공’에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나에게 주신 것에 만족하고 헛된 ‘잉여’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기 내면의 기적을 꿈꾸고, 영혼의 깊은 소용돌이에
몸을 맡깁니다. 하나님과 함께 출발한 시점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도착점 사이의 거리를, 일생동안 걸어야 하는 멋진 길이라 생각하고 그 과정 속에서의 삶을 생명의 풍요로움으로 채웁니다.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소박하지만 매 순간 새로운 길들이 보이면 그 길을 따라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을 만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대함이 되고 홀연히 떠나고
싶은 꿈이 될 때, 인생은 멋진 사건들이 되고, 나의 순간에서
‘완성된 삶’을 경험합니다.
그 때는 가까운 곳에 길동무가 된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을 찾게 될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미래의 힘을 믿으면서, 날마다 삶의 완성을 경험하는 멋진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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